송효정(영화평론가) 어떤 고요한 흐름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많은 것들을 뒤바꿔 놓는다. 시간의 흐름, 공기의 대류, 비와 수증기로 순환하는 물처럼 적요로이 변하며 대기와 풍경과 사태를 바꾸어놓는 힘이 있다. 김현정 감독의 <흐르다>는 고요하고 더딘 영화다. 무엇이 흐르는가. 우선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의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 가족들은 더러 무뚝뚝한 대화를 나누고 카메라는 텅 빈 거실, 주인 잃은 침대, 인적 없는 공장과 사무실을 오래 응시한다. 그 사이 가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들이 일어난다. 감독은 흐름의 여파에 주목하지 않고 그 흐름의 운명을 묵묵히 관조한다. 갓 서른을 넘어 더 이상 젊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을 포기하기는 애매한 나이, 진영(이설)은 취업 스터디 내에서도 잔뼈 굵은 만년 취준생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조업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으나 엄마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붙임성 없는 딸 사이에서 엄마는 가족의 윤활유처럼 건조한 일상을 버티게 해준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엄마가 사망한다. 이후론 좀처럼 되는 일이 없다. 완고하고 수완 없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의 앞날이 점점 암울해져 가는 동안 진영은 취업에 대한 꿈을 접고 마지막으로 도전이 가능한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한다. 무미건조한 지방 대도시에서의 청춘의 삶, 시간이 흐를수록 취업의 가능성은 점점 엷어져 가고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도리란 없을 것 같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제조업 역시 대출을 끌어안은 업체들의 연쇄로 운영돼 왔을 뿐 위태롭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산층으로 보이지만 실상 가족 구성원 각자가 경제적 내핍을 가까스로 견디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진영의 발에 박힌 유리 조각은 가족 내 일어날 불행에 대한 전조로 보인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태는 붕괴로 향한 흐름의 속도에 가속을 붙인다. 감독은 캐피탈 대출, 할부, 연체, 도산으로 이어지는 경제적 파산이 이들의 운명에 스며드는 과정을 파토스 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종종 이들의 잠자리, 즉 침대에서 일어나는 장면을 자주 비추는데 이들이 밤 동안 겪을 수많은 번민과 갈등으로 가득한 내면은 관객들의 상상을 통해 예상 가능할 뿐이다. 이들이 느끼는 결핍의 감정은 공간을 통해 암시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주인 잃은 침대와 텅 빈 거실로, 사업의 파산은 텅 빈 사무실과 공장 내부의 공허로 제시된다. 지나치다 싶게 과묵한 이 영화는 취업난, 제조업의 몰락, 일용직으로의 전환 등 청년세대와 중년세대의 경제적 붕괴를 보여주지만 그 결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후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과정까지 따라간다. 공장의 파산과 아버지의 수감으로 책임감을 느끼던 진영은 결국 캐나다로 떠나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아버지는 다른 공장에 재취업한다. 삶은 극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딸과 아버지의 이후의 삶들을 교차하여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지속하여 흘러가는 것들의 운명을 따라갈 뿐이다. 영화는 배경음악 없이 고정카메라를 통해 건조한 화면을 비춘다. 하지만 외견상의 건조함과 달리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정서적 흐름이 있다. 수증기가 자욱하여 거울에 물방울이 맺혀있는 욕실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엔 계절감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 습도감이 가득하다. 사람들 사이를 채우며 흐르는 보이지 않는 것, 때로 그 밀도가 높아지면 응결되어 버리는 것. 습도는 영화의 대기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채우며 흐르는 정서다. 영화 초반 비가 내리고, 아주 드물게 진영은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영은 욕실에서 나와 머리를 말리며 가족들의 사진을 본다. <흐르다>는 사건의 영화로 보이지만 인과성의 정황을 보여주는 것엔 정작 관심이 없다. 진영은 왜 코 수술을 했을까, 진영의 엄마는 어떻게 돌아가신 것인가, 공장은 어떻게 파산해서 아버지가 감옥에 가게 된 것인가. 대신 영화는 침묵, 암전, 그리고 보이지 않는 흐름의 물리학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부재하는 것들의 더딘 리듬을 타고 그들의 삶을 고요히 관조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