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훈(영화평론가) 영화는 잔혹한 전시의 예술이다. 문자 그대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스펙터클로서의 영화는 무언가를 말하기 이전에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소명으로 갖는다. 볼거리가 담보하는 투명성, 그 매개 없는 상태는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그런데 무언가를 이음매 없이 투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영화 고유의 매체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늘 자기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야만 한다. 그들은 어쩌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 그와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관객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말하고, 표현하고, 사유해야 하는 고역을 치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만들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독한 창작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번 2022년 6월, 인디포럼 월례비행에서 상영되는 세 영화의 연출자들은 모두 영화로부터의 자기 소외에 대한 대가로 타인의 삶을 획득하는 시간을 통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작품들은 모두 주인공의 삶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과정과 그 변화에 수반되는 기다림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만약 배우를 단순히 타인을 연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배우라는 직업군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의 말에 따르자면, 배우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해야 하기에 촬영이 이루어지는 동안 철저한 소외를 경험한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인격 전부를 바쳐 다른 인격을 얻는다. 이것은 배우가 변신의 신화적 힘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뜻과도 같다. 그들은 파우스트적인 고뇌를 갖는다. 배우는 자기 자신을 청산함으로써 변신에 성공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진 존재이다. <돛대>는 연출자인 이주승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반영한 작품으로,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 은구는 약 10년 동안 배우로 생활하면서 여러 오디션을 전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넘치는 열정과 달리 그의 주변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 그는 오디션에 낙방하고,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친구의 권유로 주식 투자를 했다가 돈을 잃는다. 은구는 마치 자기 삶의 마지막을 장식할 시나리오를 쓰듯이 여행을 계획한다. 담배 개비마다 숫자나 별표를 새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런 은구의 계획된 여행에 두 가지 방식으로 개입한다. 하나는 시간적인 개입으로, 반복되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그가 절망에 이르게 된 상황을 여러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연적인 만남으로, 그는 여행 중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친구의 누나를 만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개입은 일종의 화학반응을 일으키듯이 은구의 과거를 거세게 현재로 밀어 넣거나 그의 여행을 망가뜨린다. 이처럼 이 영화에는 부단한 좌절과 실패로 점철되는 서사가 있다. 은구의 꿈이 좌절되고, 은구의 계획된 여행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영화는 자기 삶의 중심에서 표류하는 은구가 어떤 걸음을 내디딜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 은구가 그간 어떤 시간을 통과했건 간에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그가 내딛는 한 걸음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혜인 배우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트랜짓>은 영화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주인공 미호가 성전환 수술 후 주변으로부터 받는 따가운 시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미호는 업계 내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조명 감독이지만, 그가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로 그에 대한 주변의 인식은 급격히 달라진다. 영화는 미호에 대한 주변의 편견과 차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우선, 언어적 담화를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현장에서 만난 아역 배우 백호가 그를 이모가 아닌 삼촌으로 부르거나 주변 사람들이 미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호에 관한 뒷담화를 하는 것이 그러하다. 또한, 영화는 미호와 주변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은밀한 몸짓을 활용한다. 촬영 도중 미호의 브래지어 끈이 노출되자 한 여자 스태프가 재빨리 미호의 옷을 올린다. 여자 스태프의 행동은 미호의 의사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여자 스태프들은 미호와 한 공간에 있거나 같은 숙소를 쓰는 것을 꺼린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미호를 바라보는 타인의 은밀한 시선을 강조한다. 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 스태프의 얼굴을 몽타주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영화는 미호로 대표되는 트랜스젠더가 당면하게 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린다. 미호의 경우만 놓고 보자면,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 성전환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완벽한 변신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이 미호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위해 변신을 감행할 용기를 냈던 미호의 이야기를 타인이라는 지옥 속에서 그려내고 있다. 변신에 필요한 것이 용기라면, 변화에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정수지 배우가 연출한 <이름 없는 다방에서>는 각기 다른 사연으로 다방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80년대 서울의 어느 다방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에는 삶의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다방 종업원 세린은 손님이 찾지 않는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 무료하여 오매불망 퇴근 시간만을 기다린다. 이 다방의 단골손님이자 시인인 철은 자신에게 걸려 올 전화를 기다린다. 끝으로 이 영화의 여주인공 노을은 오랜 시간 사귄 애인을 기다린다. 영화는 노을과 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두 사람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감각을 자명종 시계, 전화기, 성냥개비와 같은 소품의 물성을 통해 그리고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불쑥 드러나는 그들의 속내를 통해 표현한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사랑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르게 보면 이별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노을과 철 모두 누군가와의 이별을 맞이해야 할 상황에 더 가까이에 와 있지만, 정작 그들은 자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면서 희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노을이 낭송하는 백석의 시의 한 구절인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사가 아니 올 리 없다”에 반영된 시적 화자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간절함에 대한 응답으로 마법적인 순간을 그린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물론, 이 영화는 주인공이 현실을 부정하면서 어딘가로 도피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어떤 것의 공백에 조급해하지 않고 그 공백 자체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받아들이는 기다림의 태도에 주목한다. 누군가 내 곁을 떠나도 그를 기다리던 나는 여전히 여기 어딘가에 남아 온전한 나만의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배우는 영화 만들기에서 자기 자신을 시험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는 창작자이다. 배우에 관한 혹은 영화에 관한 위 세 작품은 영화 속 특정 인물이 더 나은 삶의 순간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영화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소외와 고독을 변화에 대한 승리와 환희로 바꾼다. 만약 관객인 우리가 배우에게 그리고 배우의 분신인 캐릭터에게 환호한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전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자신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소외를 극복하고 승리로 나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영화에 대한 예찬은 삶의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예찬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