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혜 <영화평론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가 있다. 이때의 ‘같은’이란 각자가 입는 속옷이 같은 종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의 속옷을 둘이 번갈아가며 입는다는 의미다. 나만의 속옷이 아닌, 너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마구잡이로 뒤섞인 옷가지다. 실상 속옷은 어떤 것인가. 가장 사적인 물품, 내밀함의 상징, 그 구체적 실체가 아니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신경 쓸 일 없다지만, 드러나게 될 때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하나의 속옷을 둘이 돌아가며 입는다는 것 자체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특히 동성의 가족 세계에서는 같은 속옷을 입는 일이, 편의와 무심과 무감 속에서, 우애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서 얼마간 일어날 수 있다. 김세인의 장편 데뷔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는 이 미묘하고 민감하며 은밀한 속사정, 그 속을 공유하며 살아온 두 여자의 지독스러운 이야기다. 두 여자, 수경(양말복)과 이정(임지호)이다. 두 여자, 엄마와 딸 사이이기도 하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모녀의 이야기를 근간에 두고 있지만 모녀라는 통상의 말이 채 껴안지 못하는 격렬함까지를 그러쥔 영화다.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의 야심이라 하겠다. 끝을 모르고 격하게 맞부딪히는 수경과 이정, 두 실존의 대립과 대립하는 두 실존의 존재감을 파고드는 이 영화의 괴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점을 강조해두고 싶어 일부러 두 여자의 이름과 그들 관계를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눠서 썼다. 그리고 계속해서 강조한다. 이 영화가 얼마나 지독하고 징글징글한지, 두 여자의 감정의 강도가 보통이 아닌지. 관계란 쌍방이라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액션을 시작하는 쪽은 대체로 또 확실히 수경이다. 스스로도 말하듯 그녀는 다혈질에 불같은 기질의 사람이다. 그녀가 발산형의 에너지를 보인다면 이정은 지나치게 말수가 적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사람이다. 이정의 액션은 수경의 도발에 뒤따르는 반응의 리액션에 가깝고,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터져 나오는 반항의 액션이다. 영화는 극명한 대척점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출발부터 둘 사이는 나빠질 대로 나빠져 있다. 이 악화의 관계가 어제오늘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이 어째서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을뿐더러 전사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런 설명의 말은 지금 이들에게 별 효력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곪아터지고 문드러진 두 여자가 자해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를 계속해 찌를 수밖에 없는 상태, 그 격렬한 충돌을 일단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말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앞뒤 잴 것 없이 몸을 던져 치받고 가격하고 뒤엉켜 싸운다. 몸뚱이와 몸뚱이가 부딪히며 서로를 쳐낸다. 격투고 혈투다. 아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폭력이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모른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게 분명하다. 만약 이영화가 두 여자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데만 그쳤다면 그것만큼 앙상하고 암담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제 길을 찾아 나간다. 거듭되는 물리적 폭력 가운데서 두 여자의 욕망의 실체는 점점 더 선연해지고, 두 여자의 대립 그 자체가 아니라 실존과 존재감의 대항으로 뻗어간다. 그 과정에서 그녀들은 각자의 엇갈리고 좌절되는 욕망과 마주할 것이다. 보기에 민망하고 당황스럽고 끝내 헛헛해지기까지 할 너절한 것들, 그러나 차마 떨쳐내지 못할 그 무엇들. 수경은 애인 종열(양흥주)의 사랑을 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경은 종열을 ‘독점’하고 싶다. 그런데 딸(들)이 문제다. 수경과 이정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수경이 종열의 딸 소라(권정은)를 대하는 태도도 만만치 않다. 소라의 졸업식에서 소라 친구들이 수경에게 인사를 하자 수경은 정색한다. “나 얘 엄마 아니야. 오늘 처음 봤어.” 수경-이정, 수경-소라 사이를 종합해 보면, 수경에게 ‘엄마’라는 역할 혹은 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의 것이다. ‘엄마’는 수경을 격앙시키고 자극하는 트리거에 가까워 보인다. 혹여 ‘엄마’라는 역할과 말이 자기 몸에 들러붙을까 봐 기겁하는 것 같고 그걸 용납할 틈을 조금도 내주고 싶지 않다. 수경이 ‘엄마’라는 말을 허용할 수 있는 최대 범위라면 ‘의리’로 표현되는 수준이다. 애정과 윤리에 기반한 모녀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이정을 먹이고 키웠으니 이정은 자기에게 그만큼의 의리는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이정은 어떤가. ‘엄마’ 수경에 관해서는 체념하고 포기한 지 오래다. 수경에게 바라는 단 하나라면 그녀가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자신을 차로 치려고 했던 것을 포함해 이정은 수경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자신을 이 지경이 되게 한 장본인으로 이정은 수경을 가리킨다. 자신조차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정은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수경의 사과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수경은 단 한 번도 이정의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수경은 이정이 유일하게 원하는 그것만큼은 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매정하다 못해 악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수경은 이정을 거부한다. 이정이 도리어 수경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사과를 요구해도 소용없다. 어쩌면 여기에는 심각한 자기혐오가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수경은 이정을 부정하다 못해 자기 존재를 망가뜨린다고까지 생각하는 것 같다. 수경은 제 배 안에 있던 이정을, 제 젖을 먹고 자란 이정을 부정한다. 수경이 이정의 첫 생리혈을 두고 “더럽다”고 말했을 때가 예사롭지 않은 신호다. 오물로 인지한 것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는 건 혐오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이정은 수경이 돈벌이하며 손님들에게 들어야 했던 온갖 더러운 말을 자신에게 쏟아냈다며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다. “너도 딸 낳아.” 수경의 대답이 무시무시하다. 깊이도, 이유도 가늠되지 않는 응징과 복수의 심연에 그보다 더 짙은 자기 체념과 혐오의 정서가 흐르는 게 아닌가. 이정 역시 복잡해 보인다. 엄마의 사과를 계속 요구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정은 수경의 부름을 완전히 거부하지 못한다. 이정은 수경의 가게로, 수경의 염색을 돕는 자리로, 수경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가고, 다시 수경의 집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정은 회사 직원 소희(정보람)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집을 나오지 못한 이유로 “제대로 준비해서 제대로 독립하고 싶었다”고 설명하면서도 이 대답이 얼마나 우습고 누추한지를 잘 안다. 차라리 수경에게 아무런 것도 기대하지 않고 집을 나와 그 길로 관계를 끊으면 어땠을까. 더는 싸울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과받겠다는 이정의 욕망은 거둘 수 없다. 이정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수경의 사과는 이정의 존재와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층 복잡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정이 혼자 오랫동안 자문했을 바로 그 질문, 이정으로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수경이라는 의문, “나를 사랑해?” 어쩌면 제 안에서만 수없이 맴돌았을 이 말을하기 위해 이정은 여기까지 왔을지도 모른다. 수경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수경이 자기를 사랑하긴 하는 거냐고 묻기 위해서다. 이번만큼은 수경의 대답이 아니라 이정의 말하기가 중요하다. 삶은 이토록 냉혹한 것인가. 두 여자의 욕망은 성취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녀들 관계가 이전과는 다른 국면으로 전환될 것 같지도 않다. 지난한 폭주와 기나긴 충돌이 잠깐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다만, 두 여자는 잠시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지독스러운 싸움과 내상 끝에 온 시간이다. 영화 초반,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리코더 연습을 시작했던 수경은 이제 곡 하나를 완주하며 숨을 고른다. 누구의 것도 아닌 여러 벌의 속옷을 세탁하던 이정은 이제 생에 처음으로 자기만의 속옷을 가지려 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서 뭔가가 변했다면이 정도일 것이다. 혼자가 돼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두 여자. 이 시간이 그녀들에게 얼마나 필요했던가. 지금은 이것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