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우 <영화 평론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2021 | Fiction | Color | DCP | 90min | 장르: 극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비평 마감을 일주일 정도 남긴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요즘 공공기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박봉에, 언제 책상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자리에 앉아있다. 여기서 나는 어떤 전사도 없는 사람이다. 답답함에 가끔 나는 원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사실 누구도 묻지 않았는데, 넌지시 자랑하고는 했다. 그날 어떤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았다. 마침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 대한 글을 쓰려 한다고 답했다. 처음 듣는 제목에 잠시 정적이 있은 후 사람들이 웃었다. 너무 당연한 말로 지은 제목이라며. “그런가요,” 가볍게 웃으며 넘겼던 것 같다. “그런가요”와 웃음 사이에는 또 다른 미세한 정적이 있었다. 그들은 느꼈을까. 정규직과 계약직 사이, 크고 작은 풍요로움과 감추기 어려운 가난 사이, 형식적인 호기심과 무의식적인 조롱 사이에 있는 것. 그 순간 여러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것이 당신들에게 당연한가였다. 지금 나와 우리는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따뜻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영화는 낮에는 더운 곳에 있어야 하고 밤에는 추운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당연하지만, 그래서 당연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것이 설령 당연하더라도 그것을 발화하는 게 우스운 이유는 또 무엇인가였다. 가난에 대하여, 궁핍함에 대하여, 곤란함에 대하여 우리는 조금 더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런저런 확대해석 속에 빠진 낮이었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을 텐데 괜히 미안해진다. 그래도 덕분에 작은 비평적 열쇠를 찾았다. 영태는 정희에게 말한다, 사채를 쓰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왜 나는 그 말이 계시와 저주 모두를 품은 말처럼 느껴졌을까. 그 순간의 긴장을 두고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이 대사는 뜬금없다. 뜬금없다는 말은 관습적인 내러티브의 호흡을 위반함을 의미한다. 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에는 이러한 순간들이 많다. 클로즈업 쇼트들이 대표적이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심각한 상황에 웃는 것이 때때로 섬뜩한 것처럼,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 이 작품 속에는 무서움이 있다. 영화는 계속 무서움을 확인하게 한다. 가령 다단계를 권유하던 어렸을 적 친구의 표정이 영화 후반부 영태의 분노와 겹칠 때. 마치 구원 앞에서 좌절한 듯 엎드려 기도를 하는 정희의 장면을 향해 사채를 쓰면 구원받을 수 없다 경고했던 영태의 언술이 달려올 때. 이상한 때에 놓였던 쇼트들이 미래의 쇼트에 대응하면서 재빠르게 날아와 날카롭게 꽂힌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묘하게 비틀어진 템포는 기이한 텐션을 예고한다. 쇼트를 붙잡는 쇼트들은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하는 걸까.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애초 구원받을 수 없는 세계관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온라인 스크리너가 종료된 검은 화면 위로 비친 나의 얼굴을 보고 물어보았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가 재밌었다는 점이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긴장에는 저항감이 있었고, 유머와 섬뜩함의 대결에서 종종 전자가 승리하고는 했다. 웃어넘김으로써 지키려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그것을 적어도 돈 때문에 잃지는 않겠다는 의지. 정희와 영태가 어떤 상황에도 끝까지 붙잡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쇼트를 붙잡는 쇼트들”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어느 때 사회적인 표정을 짓지 않는 것만으로도, 1초라도 정적을 만들어 일말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행동도 모두 대항이다. 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소극적 저항의 가능성을 말하는 작품이었다.